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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주시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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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의 불꽃을 창조하라

오쇼 라즈니쉬{명상,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


"생각은 또 하나의 꿈꾸는 상태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 자체가 환상이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건 지속되고, 살펴보는 건 사라진다. 어떤 것을 진짜로 살펴본다면, 너는 그것을 꿰뚫어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너에게 보여주던 모든 환상을 꿰뚫어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오직 궁극의 실체 뿐이다."─ 닐 도날드 월쉬

마음은 과정이며 흐름이다

마음은 형태를 갖고 있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마음’(mind)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마치 그대 속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을 잡으려고 하면 그것은 텅 빈 허공일 뿐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마음작용’(minding)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마음은 하나의 과정이며 흐름이지 물체가 아니다. 흐름은 결코 멈출 수가 없다. 흐름이 멈추는 순간 흐름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흐름이 존재하는 한 거기에 긴장이 있다. 흐름이 곧 긴장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그 움직임은 마음이 존재하는 한 멈출 수 없다. 이 지속적인 움직임이 그대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낸다.

긴장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마음을 초월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평화를 느낄 수 없다.
마음의 평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혼란이다.
무심(無心; no-mind)이
바로 평화를 뜻한다.

마음은 항상 북적대고 있고 사념의 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결코 맑은 하늘, 텅 빈 하늘, 투명한 하늘이 없다. 그대는 마음을 투명하게 만들 수 없다. 마음의 본성상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마음은 항상 뭔가가 거기에 채워지기를 원한다. 마음이 뭔가로 채워져 있을 때 그것은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텅 비어지면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허공에, 텅 빔에 저항한다. 항상 뭔가에 몰두하려 한다. 심심한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에서 무심(無心)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삶은 무심의 상태에서만이 알 수 있다. 마음을 한쪽 옆으로 치우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하고 텅 비어 있을 때, 문득 그대는 삶과 조우한다.

의식이 생각으로 가득 차고 억압될 때, 그대는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있으면 태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생각들로 가득 차면 내면의 왕국은 보이지 않게 된다. 태양을 보고자 한다면, 구름을 모두 흩어버려서 태양이 구름으로부터 나와 빛을 발산하도록 해야 한다.

사념(思念)은
텅 빈 공간에 떠도는 구름과 같다.
이 텅 빈 공간이 참된 하늘이다.
구름은 왔다가 가는 존재일 뿐이다.

진리는 그대 속에 있다

내면의 텅 빈 허공 속으로 들어가라. 진리는 그대 속에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바깥 세계를 잊어버리고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러면 그대는 빛을 발견할 것이다. 그 빛은 바로 그대의 생명이다. 그대는 그 빛으로 만들어져 있고 우주 전체가 또한 그 빛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빛이 신이다.

내면으로 들어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단지 하나의 수단으로 남게 된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대는 목적을 깨닫는다. 명상의 모든 방편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기억해내기 위한 테크닉일 뿐이다.

주시는 무심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다

주시는 명상의 출발점이고 무심(無心)은 그 완성이다. 주시는 무심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다. 자신의 의식을 따라 흐르는 생각의 물결들에 대해 주시자가 되라. 강둑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자신의 마음 옆에 앉아서 그 흐름을 주시하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간섭하거나 도중에 그것을
멈추려 하지 말라.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거나 억압하지 말라.
생각이 오면 그것을 멈추지 말고,
생각이 오지 않으면
그것을 억지로 오도록 애쓰지 말라.

고요히 지켜보는 법을 배우라

주시란 초연한 관찰, 편견 없는 관찰을 의미한다.  그대는 단지 주시자가 되어야 한다. 그저 모든 것을 지켜보는 주시자로 머물되, 어떤 것과도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다만 마음의 도로를 지켜보는 관찰자, 주시자가 되라. 주시는 내면의 혁명을 위한 가장 위대한 과학이다. 

명상의 본질, 그 핵심은 지켜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명상한다는 것은 '지켜보는 자'가 됨을 의미한다. 그대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도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주시자다. 사념이 지나가고, 욕망, 기억, 꿈, 환상이 꼬리를 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초연한 자세로 지켜보라. 아무 판단도 내리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이것은 나쁘고 저것은 좋다’고 말하지도 말고 그냥 지켜보라. 

무심(無心)은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그것은 곧 깨달음, 자유, 모든 구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인간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만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다른 자유는 없다.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이 유일한 자유이다.

"주시의 현존은 마음의 부재를 뜻하고, 주시의 부재는 마음의 현존을 뜻한다."

주시의 불꽃을 창조하라

그대 안에 주시가 떠오르면 마음은 사라져야 한다.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은 그대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마음은 꿈이기 때문이다. 꿈은 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마음과 싸우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즉시 사라진다.

주시의 불꽃, 알아차림의 불꽃 앞에서, 마음은 단 한 순간도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주시자가 되었을 때, 그대는 더 이상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않다. 그대는 깨어난다. 초롱초롱 깨어있는 각성된 의식 상태로 들어선다. 그대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된다. 그렇게 강렬한 불꽃 안에서, 의식의 빛 안에서 마음은 죽음을 맞이한다. 마음은 자살하고 만다.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라

진정한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삶은 완전한 낭비이다. 그대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면 여행의 시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꼭 알아야겠다!” 그대 존재의 가장 핵심에서 이러한 중대한 결심을 하라. 바로 그 결심이 씨앗이 된다.

내면으로 가라. 진리는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깊은 잠에 빠져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필요한 모든 것은 단지 기억해내는 것뿐이다. 일단 잠을 깨면, 갑자기 그대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꿈 속을 헤매고 다녔는지 알게 된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존재 속으로 깊이 잠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고, 깨닫고, 인식하는 것이다. 존재로의 여행은 그대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여행이 아니다. 아무데도 갈 필요가 없다.

단지 마음의 재잘거림을 멈추고
고요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여행이 시작 된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참나'(Self)를 깨달은 현자에게는 참나 외에는 더이상 알아야 할 게 없다. 왜 그럴까? 현자에게는 '나'를 육신의 형태로 동일시하던 에고가 사라져, 그 자신이 형태가 없는 존재, 즉 의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존재하는(be) 것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that I am)라는 말이 모든 진리를 압축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는 방법은 '고요히 있어라'(Be still)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고요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자신을 없애라는, 즉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관념을 버리라는 뜻이다. 고요해지기만 하면 나를 깨닫는다. 날뛰고 괴로워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벗어나, 의식이 고요하고 청정해져야만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 형상 없는 '참나'(Self)로 가슴에서 항시 빛나며,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없이 고요히 존재함으로써 알 수 있는, 이 의식만이 온전한 실체임을 알라."─ 라마나 마하리쉬 Ramana Mahar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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