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 라즈니쉬{명상,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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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혁명은 자유를 가져다 준다
외부의 혁명은 내면의 혁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외부의 혁명은 단지 개선을 할 뿐이다. 그것은 결코 진정한 혁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주위의 구조들만 계속 바꿀 뿐이다. 감옥은 바뀌지만 죄수는 그대로이다. 인간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다. 그대는 여전히 구금되어 있고, 자유가 없다.
내면의 혁명은 자유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명상은 그대를 내면의 혁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명상은 바로 그대가 배워온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미 조건 지어진 것을 다시 푸는 과정이며, 최면상태에서 그대를 해방시키는 과정이다.
그대가 텅 비고, 공간이 생기고, 침묵하고, 깨끗해지면, 혁명이 일어난다. 해가 떠오른다. 그때 그대는 햇빛 속에서 산다. 그대 내면의 햇빛 속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
그대가 침묵하게 되고 인식하게 되고 명확하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대 내면의 하늘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 처음으로 그대는 진정한 삶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신이라 부를 수도 있고, 깨달음이라 부를 수도 있다. 해방이라 부를 수도 있고, 진리의 체험, 사랑, 자유, 지복(bliss; 황홀경)이라 부를 수도 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대는 몸도 마음도 아니다
명상은
그대 내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방심하지 않고 주의 깊게
주시하는 것을 뜻한다.
그때 이것은 매우 단순해진다.
그대는 자신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 몸은 작은 아이였고, 그리고 나서 젊은이가 되었고, 그 후 늙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는 항상 그대로이다. 몸은 수없이 변해가지만 그대는 항상 똑같다. 그대에게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은 습관의 산물이다. 우리의 마음은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시계추처럼 움직인다. 그것은 절대로 중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중간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참으로 멋진,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마음은 몸보다도 훨씬 더 많이 변한다. 한순간 화가 났다가 다음 순간 화가 사라진다. 한순간 슬픔에 잠겼다가 다음 순간 기뻐한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며 지켜보는 주시자다. 그러나 주시자는 주시될 수 없다.
그대는 주체이고 이 모든 것들은 대상이다. 그대가 이것을 깊이 체험하고 알아차릴 때, 그대 속에 위대한 자유가 생겨난다. 그대는 자유롭게 되어 그대 속에 들어있는 진정한 진리를 알게 된다.
주시자는 주시될 수 없다
주시는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대의 본성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그대 내면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주시, 의식, 알아차림, 그대가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이 그대의 본성이다.
눈을 감고 그대 내면의 존재를 상세히 관찰하라. 내면의 중심에 서서 육체를 지켜보라. 그러면 그대는 육체와 분리될 것이다. 왜냐하면 ‘보는 자’는 결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관찰되는 대상이 아니다.
내면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몸과 마음을 살펴야 한다. 이때 그대는 단순히 ‘주시하는 의식’ 이다. 그리고 이 주시하는 의식 자체는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이 주시하는 의식을 그대의 가장 내밀한 핵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의식이 바로 그대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관찰될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가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은 그대가 아니다.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것,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의 가장 내밀한 핵심은
관찰의 대상도 아니고 간파 되는 것도
아니다. 주시하는 근원을
주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시자는 주시될 수 없다.
고요히 지켜보는 법을 배우라
주시란 초연한 관찰, 편견 없는 관찰을 의미한다. 이것이 명상의 모든 비밀이다. 명상의 본질, 그 핵심은 지켜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명상한다는 것은 지켜보는 자가 됨을 의미한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명상은 테크닉이 아니다. 명상은 ‘이해’이고 ‘알아차림’이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마음의 도로를 지켜보는 관찰자, 주시자가 되라.
사념이 지나가고, 욕망, 기억, 꿈, 환상이 꼬리를 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초연한 자세로 지켜보라. 아무 판단도 내리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이것은 나쁘고 저것은 좋다’고 말하지도 말고 그냥 지켜보라.
명상의 기능은 그대를 둘러 싸고 있는 어두운 구름들을 뚫고 들어가 영원한 빛이 존재하는 중심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삶은 기쁨의, 지복의, 엄청난 아름다움의, 불꽃이 된다. 그대 내면의 불꽃을 체험하는 것이 신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바깥 세계를 잊어버리고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러면 그대는 빛을 발견할 것이다.
그 빛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그 빛이 신이다.
주시가 명상의 핵심이다
주시자가 되라! 더욱더 깨어있으라! 마음과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자가 되라. 마음 바깥에 머무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모든 것을 배우게 된다.
마음에는 더욱더 적게, 마음을 벗어나서는 더욱더 많이 존재하라. 마음에 말려들지 말고 단지 마음을 지켜보고만 있으라. 마음과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것, 그것이 ‘무아지경’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것을 달성하는 날이 그대 생애의 가장 위대한 날이다. 그날, 그대는 다시 태어난다. 그날부터 그대는 더 이상 물질의 일부가 아니다. 그대는 신의 일부가 된다.
주시가 떠오르면 마음은 사라진다
명상의 핵심은 주시이다.
마음은 행위자이지만 주시는
무위(無爲)의 상태다.
행위자가 아니라 주시자가 되는 것,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그대 안에 주시가 떠오르면 마음은 사라져야 한다.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마음은 그대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마음은 꿈이기 때문이다. 꿈은 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주시자가 되었을 때, 그대는 더 이상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않다. 그대는 깨어난다. 초롱초롱 깨어 있는 각성의 상태로 들어선다.
중요한 것은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시하고, 주시하고, 주시하고 또 주시하라. 그 주시가 더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을 때 변형이 일어난다. 그대가 주시하고 있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주시자 자체가 주시되고,
관찰자 자체가 관찰된다.
그대는 집에 당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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