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스트웨이①Meditation/Emptiness

☀036.텅 빈 상태로 머물라

행복♡24 2022. 7. 8. 05:03

텅 빈 상태로 머물라

무지 {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


“텅 빈 대나무가 되라.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텅 빈 대나무가 되라. 그러면 그 외의 모든 일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대가 텅 비는 순간, 그대는 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대가 텅 비는 순간, 저 너머로부터 무엇인가가 그대를 꿰뚫어 가득 채울 것이다. 그대가 완전히 텅 비는 순간, 전체가 수만 가지 기쁨과 수만 송이 꽃들을 그대에게 쏟아 붓기 시작한다. 그 장려함은 끝이 없다.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고 황홀경이다. 바로 그 순간 그대는 탄생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오쇼 라즈니쉬《명상,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

진리는 우리 자신이다

진리는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존재 그 자체다.
진리는 순수한 자아, 무한한 하나,
궁극적인 실체이며 순수의식이자
'알아차림' 그 자체다.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멋진 누군가가 되기 위해 평생 노력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자신이 사실 그 어떤 누구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발견이고, 이로 인해 우리는 참자유와 참기쁨, 그리고 참평화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 중 진실로 영원한 것 ─ 진정한 행복과 기쁨, 평화와 빛, 그리고 공() ─ 은 모두 우리 안에 있다. 그것들은 항상 존재하지만 우리가 순간적이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는 동안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참자아를 깨닫는 것이 온갖 고생 끝에 ‘어딘가에 도착하는 일’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어딘가에 도착한다거나 무엇이 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형언할 수 없이 위대한 참자아다. 

단지 우리는
나의 진정한 자리가
‘지켜봄의 근원’이자
모든 현상이 비롯되는 공(空), 즉
‘비어 있음’(emptiness)이란 것을
깨닫고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공(空)은 우리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의식은
단순하고 고유하며
독특한 것이지만, 동시에
고유함과 독특함의 개념을
초월한 것이다.

이것은 가장 진정한 의미의 자기의식이다. 마음보다 먼저 존재해온 ‘지켜봄의 근원’은 우리 안에 있는 진정한 현자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지만, 우리 존재 그 자체인 순수의식, 알아차림은 결코 잃을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참된 존재의 의식이자 자기인식(Self-awareness)이다. 이 의식은 지고하다. 지각될 수 있는 그 어떤 대상에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찾아 헤매던 현자다. 규정지을 수도, 형언할 수도 없는 지혜의 보화(寶貨)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존재는 하늘보다 더 넓고 공간보다 더 광활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여기'에 있다. 혼란스럽고 술렁이는 마음이 아닌, 내면의 고요함으로부터 바라보라. 주의를 내면의 고요한 침묵의 공간으로 되돌리는 훈련을 하라.

고요함의
자리에서 지켜보라.
고요하며 평온한 우리의
진정한 존재를 찾기 위해
지금 있는 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의를 개인성의 영역으로 잡아끄는 에너지의 흐름을 지켜볼 수 있는데, 그 영역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하며 존재들이 개인이라는 독(毒), 즉 ‘에고’(ego)로부터 비롯된 독에 고통받고 있는 곳이다. 

“고요함(Stillness)이란 무엇인가? 바로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사고로 변환시켜주는 내면의 텅 빈 허공, 알아차림이다. 그 알아차림이 없다면 인식도, 생각도, 세상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한 알아차림(awareness)이다. 존재의 심연에 있는 당신의 실체는 고요함과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이름이나 형상보다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당신의 ‘참된 자기’(I Am)이다. 내면의 고요함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에크하르트 톨레《고요함의 지혜》

텅 빈 고요함으로 머물라

고요함
가운데에서부터
바라보기 시작하라.
그것은 이미 여기 있다.

자신을 어떤 관념,
어떤 형태의 시간과도
연관시키지 말라. 그러면 그 즉시,
고요하고 광활하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마음이라는 나무가 격렬하게 흔들릴 때도 그 움직임을 고요한 곳에서 지켜보게 될 것이다. 마음과 연관된 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라. 모든 의도, 중요한 날짜, 예약, 추측, 약속, 염원을 내려놓으라. 과거를 내버려두라. ‘이다음에는?’ 하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마저도 내려놓으라. 모든 것을 잠시 내버려두라. 어떤 것도 만지지 말라. 몸의 감각이든, 생각이든, 느낌이든, 기억이든, 기대이든, 모든 것을 다 내버려두라.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고
텅 빈 상태로 머물라.
당신은 그저 여기에 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느껴보라. 

이제 ‘여기’를 내려놓으라. ‘있다’도…. ‘나’도….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 ‘나’마저 만지지 않으면 무엇이 남아 있는가? 당신은 얼마나 큰가? 어떤 형태인가? 이것은 사라질 수 있는가? 

당신은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참자아의 끝에 다다를 수 있는가?

따로 떨어뜨릴 수 없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 그것은 어떤 속성도 띠지 않으며 불변한다. 바로 모두의 참자아다. 언젠가 당신은 이 몸과 이 성격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잘라낸다면 ‘당신’으로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내면의 의식의 공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익숙해질수록 과거는 서서히 그 영향력을 잃을 것이다. 당신은 더욱 생기가 넘칠 것이며 현존감을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고요함과 평화는 당신 존재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있는 그대로 깊이 수용할 때마다, 당신은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진다. 지금 이 순간 드러나고 있는 것과 다투지 않고 지금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줄어들면서 그 자리에 ‘깨어있는 고요함’이 들어선다. 생각을 멈추고 고요히 있을 때, 지혜가 바로 거기 있다. 고요하게 멈춘 채 그저 보고 그저 들어라. 그 이상은 필요 없다. 고요하게 멈출 때, 생각 너머의 지혜가 내면에서 깨어난다. 진정한 지혜는 고요함 속에서 나온다. 고요함 속에 답이 있다.”─에크하르트 톨레《고요함의 지혜》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은
본래 끝이 없다. 그러니 무언가가
‘되려는’(becoming) 불안정한 느낌보다는
진정한 존재 자체의 안정된 느낌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을 길러라.

존재(Being)의 안정감과 친숙해지라. ‘텅 빈’ 느낌에 익숙해지라. 그것은 해롭지 않다. 오히려 나의 참자아를 그렇게 존중함으로써 당신은 큰 기쁨과 평화, 사랑과 믿음, 그리고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존중이다. 비어 있는 느낌에 익숙해지라. 그 텅 빈 곳으로부터 삶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펼쳐져 나오는지를 살펴보라.

주의를 내면의 고요한 침묵의 공간으로 되돌리는 훈련을 하라. 이제 철없는 태도를 버리고 ‘실제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당신의 육체는 유한하지만 불멸의 존재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몸이 아직 따뜻할 동안, 이 육신의 삶을 당신의 영원한 존재를 재발견하는 데 쓰라.

참자아를 깨닫는 것은 자연스럽고 전혀 힘들지 않다. 진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나타난다. 진리가 당신 자신으로서 늘 존재하는데 굳이 오랫동안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당신이
형태가 없고 변함도 없는
궁극의 주시자(witness)임을
깨닫는 것뿐이다.

당신은
삶 자체이고, 동시에
당신 삶의 주시자이다.

신념과 정체성이
마음속에 밀려 들어오기 전까지
삶은 얼마나 단순했던가?

하지만 그 후, 본래 아름다운 마음의 영역은, 일상적이고 제한적인 개인의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한 에너지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건화된 마음의 너머에는 더 높고 맑은 시각이 있다. 그것은 깨어난 존재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기쁨과 빛과 평화 속으로 들어간다.

언젠가 당신은,
몸이 우리의 본질이나
실존에 결코 어떠한 제약도
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제약은
한낱 꿈일 뿐이다.

갈등이나 곤경처럼 보이는 것들을 포함한 모든 것이 실은 이 신비롭고 위대한 의식이다. 모든 것은 마법 같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평범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런 이원성(二元性)의 영역을 넘어 그저 모든 것을 초연히 지켜보는 순수한 관찰자, 즉 태어난 적 없는 ‘알아차림’(Awareness)으로서 살아간다.

“'알아차림'은 어떤 것이 아니다. 대상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끔 그것을 가리켜 ‘아무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이 아니며,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대상으로서 발견될 수 없다. 그것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알아차리는 그것으로 ‘있는’(be)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배경에는 공간이 반드시 존재한다. 마치 존재하는 모든 소리에는 고요함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 공간이 고요함은 모두 텅 비어 있는 배경과도 같은 존재다. 텅 비어 있는 배경으로서 늘 거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나'다. 그것이 '배경 자아'다. 텅 비어 있는 그 자리는 '알아차림'의 자리이고, 명료한 의식의 주체로서의 '배경 자아'다. 이게 '진짜 나'다. 알아차림은 마음으로 찾을 수 없다. ‘알아차림’은 어떤 대상이 아니며, 관찰되거나 지각될 수 있는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직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알아차림의 현존’을 대상으로서 찾거나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자신이 이 '열린', '텅 빈', '알아차리는' 현존임을 알면서 그것으로 존재하라. 그리고 모든 경험과 친밀하게 하나이면서 동시에 경험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며 완전히 자유로운 이 현존을 모든 경험의 한가운데에서 발견하라.”─루퍼트 스파이라《알아차림을 알아차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