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직접적인 길
행복으로 가는 직접적인 길
☀루퍼트 스파이라{알아차림을 알아차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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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심리적인 괴로움의 원천이 된다. 이와 반대로 우리의 본모습을 기억하는 것, 즉 자아 그 자체에 대한 기억이나 인식은 모두가 갈망하는 평화와 행복의 원천이다.
행복이란 우리의 본성이며,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마음의 원천에,
우리 자신의 핵심부에 존재하고 있다.
행복은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대상적 경험의 일종으로 행복을 경험할 수는 없다. 행복은 우리의 본래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행복 그 자체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불행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불행은 우리가 대상적 경험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외관상 개별적인 자아가 대상적 경험 속에서는 더 이상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제야 비로소 우리 안에서 평화와 행복을 찾게 될 가능성이 열린다. 바로 이 깨달음이야말로 본질적으로 평온하고 무조건적으로 충만한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회귀하는 첫걸음인 동시에 해결책이다.
가장 깊고 본질적인 내면에 존재하는 평화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명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에 집중하고, 마음을 관찰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명상은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마음의 본질을 명료하게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차림의 경험을 향해
마음을 보낼 수 없다. 다만
경험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멀리
떠나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차리기'(Being aware)란 주의 집중을 이완시키고 대상적 경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주의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쉬게 하는 것이다.
대상적 경험의 내용으로부터 벗어나
대상적 경험의 근간을 이루는 원천이나 본질로
마음이 향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명상이나 기도의 본질이다.
이것이 바로 '내면으로 향하는길'이며, 스스로를 기억하고(자기 기억, self-remembering), 스스로를 탐구하는(자기 탐구, self-enquiry) 직접적인 길(Direct Path)이다.
대상적 경험으로만 향하기 마련인
마음의 주의를 내면으로 향하도록 해서
스스로의 본래적이고도 실체적인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길이 곧
"직접적인 길"(Direct Path)이다.
직접적인 길은 '자기 탐구'와 '자기 준수'와 '자기 굴복'의 길이자 '길이 없는 길'이다. 이 길을 통해 유한한 마음은 임의로 취했던 한계에서 벗어난다. 결국 본질적이며, 환원 불가능하고, 나누어지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알아차림의 본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최상의 명상은 마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정신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스스로의 원천이자 본성인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되돌아가고, 쉬고, 깊이 침잠하는 것이다.
알아차림(Awareness)이
스스로에게 되돌아가는 것,
자신의 본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곧
"알아차림을 알아차리기"이다.
이것이야말로 명상과 기도의 핵심이며,
영원한 평화와 행복으로 향하는
'직접적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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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 vs 마음
스크린의 활동이 영화이고,
바닷물의 활동이 해류이듯이,
알아차림의 활동이 곧 마음이다. 이처럼
마음은 알아차림이 움직이는 것이며,
알아차림은 마음이 쉬는 것이다.
마음은 알아차림의 활동이자 창작물이다. 알아차림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듯하다. 알아차림은 자신의 활동 속에서 스스로를 가려버린다.
알아차림을 발견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바로 알아차림 그 자체의 한정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무엇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알아차림을 더 가릴 뿐이다.
마음과 알아차림의 관계는
꿈속의 인물과 꿈을 꾸는 사람의
마음 간의 관계와 동일하다.
꿈이란 꿈속 인물의 관점에서 꿈속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꿈속 인물의 모든 것은 꿈꾸는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지만, 꿈속의 인물은 이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꿈속 인물이 오로지 자신의 경험의 대상적인 내용에만 집중하는 한, 그는 자기 마음의 본질도, 세계의 실체도 절대로 인식할 수가 없다. 결국 그는 자신이 갈망하는 평화와 행복을 결코 찾을 수 없다.
자신의 본질을 알려면 경험의 대상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대상들을 알게 해주는 그 무언가에 주목해야만 한다. 모든 지식과 경험을 알게 해주는 알아차림의 본질을 알아야만 한다. 자신의 마음의 정수인 알아차림의 경험을 알아차려야 한다.
명상이란 알아차림을 스스로의 활동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알아차림의 단순한 경험은 우리가 알게 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명상이란
마음의 활동을
가라앉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본성이
순수한 앎, 곧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비활동(non-activity)으로서의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활동은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마음의 본질인 순수한 알아차림이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알아차림에 대한 인식, 즉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늘 볼 수있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식될 뿐이다.
깨달음이나 깨어남은
새롭거나 특별한 종류의 경험이 아니다.
경험 자체의 본질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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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길 ─ 길 없는 길
마음은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색칠하는 활동이다.
반대로 색칠을 지우는 것, 그리하여
색깔이 지워진 마음의 본래 상태인
순수한 알아차림을 '드러내는' 것이
곧 명상(meditation)이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즉 알아차림이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무런 색깔이 없는 비대상적 경험이다. 마음이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 던지고 난 후의 본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순수한 마음'이며 '알아차림 그 자체'이다. 내재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불멸의 정수를 '아는' 것이다.
스스로에게서 출발해
스스로에게로,
알아차림에서 출발해
알아차림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은 없다.
길이 있을 여지가 없으니 수행을(practice) 할 여지도 없다. 알아차림에서 출발해 알아차림으로 향하는 데에는 수행자도 없다. 우리는 알아차림을 제외한 다른 어떤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만 수행할 수 있을 뿐, 알아차림 그 자체에 대한 알아차림을 수행할 수는 없다. 사실 개별적인 자아인 '에고'는 그 대상과 알아차림 사이에서 발생하는 활동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스스로와 너무나 가깝기에 자기 자신과 아무런 거리가 없다. 따라서 길이 놓일 공간조차 없다. 어떤 길이 있다면 알아차림으로부터 출발해 다른 대상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알아차림으로부터 알아차림까지는
어떤 공간도 거리도 시간도 없다. 따라서
어떤 길이나 수행(practice)의 가능성도 없다.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비수행(non-practice)에서는 애쓸 필요가 없다. 어떤 식으로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면 마음을 하나의 대상으로 향하게 하거나, 주의의 초점을 제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연유로
'직접적인 길'(Direct Path)을
"길이 없는 길"(Pathless Path)이라고 부른다.
이 길을 통해 유한한 마음은 임의로 취했던
한계에서 벗어난다.
직접적인 길에서
알아차림(awareness)이란
출발점이자 과정이자 목적지이다.
알아차리기(Being aware)란
아는 주체이자 앎의 과정이며
알려지는 대상이다.
알아차림(Awareness)은
알아차림을 알아차린다.
알아차리기(Being aware)란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Awareness)은
단순히 그 자신으로 '있음'(being)으로써
자기 자신을 안다.
우리는 직접적인 길 안에서
도착과 함께 출발하여 거기에 머무른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은 스스로와 함께 출발하여
스스로와 함께 머문다.
따라서 최고의 명상은
그저 존재하는(be) 것이다.
깨어있는
알아차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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