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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나의 본성: 사트-치트-아난다

행복♡24 2022. 6. 22. 23:49

나의 본성: 사트-치트-아난다

라마나 마하리쉬 {있는 그대로}☀


“당신이라는 소중한 존재의 근원이자, 당신들 사이를 넘나들고, 당신들을 하나로 이어주며, 이후의 삶과 앞으로 다가올 영원에 대한 약속이기도 한 경이로운 생명력인 하느님은 무엇인가? 이러한 하느님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생각이라는 '있음'이다. 영속되는 생명의 '있음'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있음'이고, 생명이 사랑으로 엮어져 나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있음'이다. 그것은 또 완전한 기쁨인 '있음'이다. 그것은 당신의 유산이자... 당신의 운명이다. 당신이 기쁨과 행복의 상태로 돌아오면 하느님의 자리에 돌아온 것이다. 기쁨 자체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쁨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있음(Isness)이다.”─제니지 나이트 《람타 - 화이트북》

나는 누구인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행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행위자,
그를 지켜보는 목격자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the Self)다.

존재 ─ 의식 ─ 지복

「나」는 늘 현존한다. 그것은 그냥 있을(being) 뿐, 그 무엇으로도 정의 내릴 수 없다. 굳이 정의하자면 ‘나는 나다’(I am that I am) 정도가 최선이다. 유일한 실체인 「나」를 묘사하는 ‘사트-치트-아난다’(sat-chit-ananda)‘존재(Being)-의식(Consciousness)-지복(Bliss)’을 의미하며, 지고한 실체가 존재와 다르지 않고, 의식과 다르지 않으며, 지복과 다르지 않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우리는 현상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말을 빌어서 「나」 ‘존재-의식-지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존재(sat)인
「나」의 빛이 의식(chit)이며
「나」의 본성이 지복(ananda)이다.

'나'의 세 가지 측면은 통합된 전체로 체험된다

「나」는 ‘순수 존재’이며, ‘나는 이렇다’거나 ‘나는 저렇다’라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내가 존재한다’(I am)는 주관적 인식이다. 이는 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으며, 오로지 존재에 대한 알아차림(awareness; 자각)만 있는 상태다. 왜냐하면 이 알아차림은 앎 자체이자 의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의식을 지복(Bliss)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의식을 직접 체험하면 지속적인 행복에 잠기기 때문이다.

「나」의 세 가지 측면인 ‘존재-의식-지복’은
따로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 체험된다.
축축함과 투명함과 액체라는 물의 세 가지 특징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완전한 지복, 완전한 평화다.
「나」만이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의식이다.
「나」는 고요한 무념(無念)의 상태로서,
깨어지지 않는 평화와 온전한 고요함이다.

행복은
「나」의 본성이며,
「나」는 행복 그 자체다.
이 사실을 알고
늘 ‘참나’의 상태에 머물며
영원히 지복을 누리도록 하라.

외부 조건 때문에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진정한 행복의 보물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참나’를 깨달아야 한다.

개체로서의 '나'와 있는 그대로의 '참나'

「나」는 존재의 참되고 자연스러운 상태, 본연의 상태, 본래의 상태이다. 만물에 편재하는 유일한 실체인 「나」는 개체로서의 나와 별개로 구분되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직접 체험하고 있으며,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근원이자 본질이며 본성이다.

삼라만상은 「나」 안에 늘 존재하며, 「나」에 속해 있다. 삼라만상은 「나」로부터 생기며, 「나」를 위해 존재한다. 「나」에 의해 삼라만상이 존재하며, 이 모든 것은 실재하는 실체로서 하나다.

개체로서의 '나'는 마음이 빚어낸 것일 뿐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진짜 나의 진실한 체험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개체로서의 나와 ‘참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언제나 현존하며 언제나 체험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한계 짓는 마음의 습관을 멈출 때라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참나’를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영원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
인식하는(알아차리는) 상태(Self-awareness)를
‘깨달음’(Self-realization)이라고 한다.

'참나'를 깨달은 상태

‘참나’를 체험하는 상태를 가리켜‘깨달음’ 또는 ‘앎’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따로 존재하기를 그친 순간에 맞닥뜨리는 유일한 실체를 자각한 상태다. 이런 각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사람을 ‘깨달은 자’라 부른다. 

「나」를 깨달은 상태는 무언가를 새롭게 얻거나 저 멀리 보이는 어떤 목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있었던 그대로, 또한 항상 있는 그대로 그냥 존재하는 상태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여기는 태도를 버리기만 하면 된다. 

우리 모두는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가 늘 하던 이런 행위를
그치기만 하면, ‘참나’가
곧 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I am)가 신이다

그 ‘나’가 신이다.
신의 이름은 곧 ‘아이엠’(I am)이다.
당신은 늘 존재한다.
그 ‘존재함’(Being)이 「나」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신을 아는 것이다.
「나」를 알면, 저절로 신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수천 또는 수만 개에 이르는 신의 이름 가운데, 생각을 여의고 가슴에 머무는 신에게 「나」 혹은 ‘나는 존재한다’ 만큼 참되고, 합당하며, 아름다운 이름은 없다. 에고가 사라지고 난 후 내면을 응시하는 가슴의 공간에서는, 알려진 모든 신의 이름들 가운데 「나」라는 이름만이 말없는 지고의 말로 솟아올라 승리의 메아리로 울릴 것이다. 절대적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이며, 곧 「나」다. 

신은 당신 안에 있다.
그는 항상 1인칭인 ‘나’로서
당신 바로 앞에 있다.

당신은 자신이 개체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또한 당신 바깥에는 우주가 존재하며, 우주를 초월한 곳에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체성이란 스스로가 신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여기는 착각이다. 이 착각이 물러나면, 오로지 신만 남는다.

앎이란 신이 곧 「나」라는 영원한 진리가 드러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마음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 마음의 장애가 모여, 자신이 개인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의 장벽을 이룬 것이다.

  ‘내’ 가 앎, 즉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awareness)은 '나'의 다른 이름이다. 「내」가 알아차림 자체이므로 구태여 그걸 얻거나 닦을 필요가 없다. 「나」 아닌 것들을 「나」로 인식하는 일을 그치면 오직 순수한 알아차림만이 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나」이다.

이 오래된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유일무이한 '알아차림' 속에서
안팎을 두루 비추는 ‘의식-지복’의 광휘가
바로 지극히 높고 더없이 행복한
근원적 실체인 「나」다.

「나」의 자리에 머무는 의식만이
티 없는 깨달음의 빛,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