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존재의 연속성과 확실성
존재의 연속성과 확실성
☀루퍼트 스파이라 {순수한 앎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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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가는 것은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당신 삶에 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자신과 분리되거나 떨어질 수 없는, 평생 당신과 함께하는 그 하나는 무엇인가? 당신의 경험에 연속성을 주는 어떤 것이 모든 경험 내내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생각은 분명히 그것이 아니다. 생각들은 때때로 끊기기 때문이다. 생각들은 오고 간다. 느낌과 감각도 분명히 그것이 아니다. 오고 가기 때문이다. 보이는 모습, 소리, 맛, 감촉, 냄새와 같은 지각도 아니다. 이것들도 생각, 느낌, 감각처럼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험에 연속성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 연속성은 무엇에서 나오는가? 당신의 경험에는 연속성이 있고, 그 연속성은 틀림없이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다.
오고 가는 어떤 것도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생각, 느낌, 감각, 지각 등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모든 대상은 오고 간다. 당신의 정체성을 둘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연속적인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늘 있는 그것’뿐이다.
만약 오고 가는 것, 때때로 끊기는 것에 정체성을 둔다면, 자신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늘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 느낌, 감각, 지각에 정체성을 둔다면, 당신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늘 느낄 것이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당신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 사라진다는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이어지는 생각, 느낌, 행동, 관계를 미묘하게 통제할 것이다.
진정한 안전을 원한다면, 정말로 안전한 것에 정체성을 두어야 한다. 안전과 그에 따른 평화를 원한다면, 나타나거나 움직이거나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 안전한 것에 정체성을 두어야 한다.
당신이 세계에 실재성(Reality)을 부여한다
경험에 연속성과 연결성을 주는 것은 당신 자신이다. 당신이 모든 경험에 실재성을 부여한다. 당신의 정체성을 대상에, 보이는 것에 두지 말라. 몸, 마음, 세계는 연속되거나 영원하지 않다. 거기에는 안전이 없다. 평화가 없다. 몸, 마음, 세계가 연속되고 영원해 보이는 것은 당신 자신인 알아차림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가는 것은 가게 놓아두라. 어떤 것이든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게 놓아두라. 그러면 사라질 수 없는 단 하나가 남을 텐데, 삶에서 그것의 존재를 서서히 느껴 보라. 그것은 처음에는 경험의 배경에 있는 ‘평화’로서 알려지고, 다음에는 몸과 마음을 점점 더 그 존재로 가득 채우며, ‘행복’으로서 당신 경험의 전면에 흐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세계에 실재성(Reality)을 부여한다.
당신의 참된 자기인 ‘알아차림’(Awareness)이 바로
늘 존재하는 모든 경험의 실재이며, 그 실재는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스크린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온갖 사물들과 인물들의 다양성을 통합하듯이, 몸, 마음, 세계의 모든 것에 연속성과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인 '알아차림'이다. 보이는 모든 것은 그것에게서 그들의 존재와 실재성을 빌린다. 바로 당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재(substance)이다.
참된 자신인 알아차림으로 머물라
알아차림인 ‘나’는 모든 경험을 하는 내내 늘 현존한다. 알아차림은 생각, 감각, 지각이 아니지만, 그런데도 당신은 부정할 수 없이 현존하며 알아차린다.
모든 생각, 감각, 지각은 ‘순수한 앎의 빛’, 순수한 알아차림의 변형이다. 마치 햇빛이 모든 대상을 비추며 보이게 해 주듯이, 모든 경험을 비추며 모든 경험을 알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알아차림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의 확실성은 생각이나 감각, 지각처럼 덧없고 순간적인 어떤 것에서 올 수 없다.
더 이상 자신의 참된 자기를
대상에서 찾지 말라.
당신은 이미 당신이 찾고 있는
참된 자기, 알아차림이다. 그리고
이 참된 자기, 즉 대상이 아닌 알아차림을
아는 유일한 길은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경험이 나타날 때, 그 경험에는 그것을 아는 앎이 완전히 스며 있다. 하나의 생각에는 오직 생각하는 경험만 있을 뿐이며, ‘생각함’에는 오직 그것을 아는 앎이 있을 뿐이다. 그 앎이 우리의 '참된 자기'이자 ‘어떤 것도 아닌 것’(no-thing)인 이 투명하고 텅 빈 알아차림이다.
이 텅 빈, 알아차리는 ‘어떤 것도 아닌 것’은 마치 텅 빈 스크린이 영상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생각하는 경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득한 영상은 텅 빈 스크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득한 경험(생각, 감각, 지각)도 텅 빈 순수한 앎,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텅 빈, 아는 현존이다.
생각, 감각, 지각에는 오직 그것을 아는 앎, ‘경험함’만 있을 뿐이며, 그것이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이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은 모든 것의 가득함으로 드러난다.
우리의 참된 자기인 알아차림을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님’(無), 텅 빈, 투명한, 또는 공(空)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본질이 어떤 종류의 대상으로서 찾아지거나 느껴지거나 알려지거나 보이거나 경험될 수 없다는 경험적인 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텅 빈 ‘아무 것도 아님’만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경험을 이루는 질료이자 본질이고 실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다. 어디를 바라보더라도, 우리는 참된 자기만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신의 부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 알아차림은 그 자신의 부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부재를 ‘알아차리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존하며 알아차리는 ‘어떤 것’은 우리가 ‘알아차림’이라고 부르는 것일 것이다.
자기 자신의 경험 안에서 알아차림은 영원하다. 이 ‘알아차리는 현존’을 특별하고, 멀리 있고,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의 본성인 순수한 알아차림은 사실 우리에게 가장 분명하고 친밀하며 평범하고 익숙한 경험이다.
그저 자신이
그것임을 알면서
그 알아차림으로 머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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